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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현종호
  • 기사등록 2019-04-19 10:1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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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을 타고 온 여자'

입금 완료했습니다, 전무님.”

수고 많았어, 박대리. 요즘 바쁠 텐데 사적인 일로 고생시켜서 정말 미안해.”

아닙니다. 제 일 착오 없이 다 해가면서 전무님 돕는 일이라서 업무엔 문제없습니다.”

취업준비생이 가장 선호하는 우리기업의 전략기획실 대리는 그래도 이런 일을 맡기기에 믿음이 가는 인재였다. 훈훈한 바람이 열려진 창으로 쏟아져 들어와 벅차게 몸에 감겨왔다. 봄이 멀지 않은 모양이었다. 매화꽃향기가 벌써 물컹거렸다.

아파트 생활비용 일체가 통장에서 인출되도록 조치했습니다. 그리고 이건 한정도 학생 등록금 입금하고 경비 모두 제하고 남은 겁니다.”

대리가 내 앞으로 봉투를 가져왔다.

아냐, 이건 자네가 생활비에 보태 써.”

그래도........”

사양 말고 받으시라니까. 사적인 일이라서 내 통장에서 인출해서 자네한테 줬던 거니까 차후에 문제될 거 전혀 없어.”

그래도 백만 원이 넘는 돈을 제가 어떻게......”

당신, 그 역할 충분히 했잖아. 사양 마시고 넣어두시게.”

대리는 잔뜩 무안해하며 봉투를 재킷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박대리.”

, 전무님.”

근데 말이야.”

앞으로도 말씀만 하십시오. 좋은 일을 하고 계신 것 같아서 저도 보람을 느끼고 있습니다.”

두뇌회전이 빠른 대리가 추가되는 내 부탁을 서슴없이 맡아서 처리하길 자청했다. 회사자금을 착복 유용하는 건 아니더라도 사적인 일로 기획실의 인재를 활용한다는 게 께름칙했지만 현재 내 입장에선 그의 도움에 의지하는 것이 최선이었다.

그 여자 말이야.”

그 여자라면 돌아가신 사모님, 아니 그분.......”

그 여자를 내 앞에서 어찌 호칭해야할지 대리가 한참을 망설였다.

자네 편하게 그분이라고 해, 그럼.”

, 전무님.”

그 여자 지금 어디서 편히 쉬고 있는지 좀 알아봐줘. 그 학생 한정도 어디서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도 좀 알아봐주면 내가 더 고맙고.”

수일 안으로 알아봐드리겠습니다, 전무님.”

대리는 내게 깍듯하게 인사를 하고나서 사무실 제 자리로 돌아갔다.

어제만 해도 날씨가 제법 쌀쌀했었는데 오늘은 제법 따사로운 기운이 느껴지는 게 도심의 풍류를 즐겨볼 만했다. 파라솔의자에 앉아 커피 한 잔 음미해가며 담배연기를 폐부 깊숙이 삼키는 동안 내 삶의 단상들이 주마등처럼 뇌리를 스쳐갔다.

살아가다보니까 이런 만남도 다 있군!”

정확히 21년이 흘렀네요.”

마침내 여자가 오랜 침묵을 깼다. 머릿속에서 작은 입자로 된 시간들을 광주리에 담아보았다. 21년이란 시간들은 결코 적은 량이 아니었다. 내 앞에 밀어닥친 지금 이 상황이 현실인가 싶을 만큼 믿기지가 않았다.

그날의 그 음성은 여전히 똑 같은데 내 옆의 여자는 아직도 한없이 낯설기만 했다. 놀란 표정을 애써 감추고 짐짓 태연한 척하는 나를 여자는 그냥 무덤덤하게 받아들였다.

지금도 커피 많이 마셔요?”

여자가 불쑥 물어왔다.

그렇지 뭐.”

대충 답하고 나서 가방을 열고 허둥지둥 책을 꺼내들었지만 나는 활자를 읽어낼 수가 없었다. 까만 눈동자에서 전해오는 몽환의 눈빛, 찰랑이는 머릿결에 살포시 드러나는 미소 머금어 아직도 뽀얀 얼굴, 그리고 갸름한 손에 갸름한 그 얼굴. 나는 몹시 흥분하였다. 흘러온 세월 속에서도 여자는 그 고왔던 모습 그대로 변함이 없건만 세파에 찌들고 풍파에 삭을 대로 삭아버린 내 몰골에 나는 한없이 부끄러웠다.

커피 마시러 갈 거야?”

아니.”

마치 토라지기라도 한 양 가지런한 눈썹을 잔뜩 찌푸려가며 거절하는 표정마저도 여자는 그 시절 세희를 똑같이 닮아 있었다.

오빠는 커피 마셔요, 그럼. 난 술 한 잔 할 거야.”

오빠라는 소리에 갑자기 등줄기로 소름이 찌르르 끼쳐왔다. 도대체 이 사람으로부터 얼마 만에 들어보는 오빠라는 소리란 말인가! 아직도 잔뜩 낯설기만 한 그 여자와 함께 딱딱한 의자에 앉아서 날아온 맥주를 목구멍 안으로 털어 넣는 동안 피안의 종착지로 달려가는 열차는 힘차고 거침이 없었다. 그러나 지나온 시간을 추억하는 덴 아무런 지장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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