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메일전송
  • 현종호
  • 기사등록 2019-04-19 10:23:44
기사수정

아름다운 노래가사에 혼을 실어 줄곧 노래만하다 쓸쓸히 생을 마감해야 했던 비운의 가수를 추억하며 술잔 앞에서 청승떠는 동안에 내가 만난 여자가 세희였다. 각혈을 쏟아내는 와중에도 자기만의 감흥에 흠뻑 젖은 소주잔을 빨아대다가 간경화로 스러져간 김현식처럼 김광석이 스러져간 겨울날 오후에 나는 흑석동 대학가 선술집에서 같은 과 후배 세희를 만났다.

여기까지.”

세희가 말렸지만 나는 내 잔을 비우고 다시 채우고 다시 비우고 다시 채웠다. 연이어 퍼부어댄 술 때문인지 단장의 아픔이 느껴졌다.

백주 대낮부터 청승떨어대는 꼴하곤, 웃겨 정말.”

그녀가 내 잔을 덥석 물어가더니 목구멍 안으로 단숨에 소주를 털어 넣곤, ! 하고 탄성까지 흘렸다.

아줌마, 여기 소주 한 병 더.”

넌 이제 그만 해.”

그깟 대중가수 하나 죽었다고 술잔이나 빨아대면서 선배가 청승떠는 꼴 난 정말 우습고 한심해.”

아까운 사람이 안타깝게 죽어간 거라서 내가 아쉬워해주는 거야, 인마.”

안타깝다고?”

“.......”

세희가 미간을 찌푸렸다. 수줍음 많은 노총각도 아니건만 그녀가 내 앞에서 미간을 찡그리고 물어올 때마다 얼굴이 붉어지고 코가 벌렁거리는 이유를 몰라 나는 또 피식 웃어야 했다.

이보시오, 선배님. 지금 당장 밖에 나가봐. 안타깝기로 치면 간절하고 불쌍하고 처절하고 눈물겹고 가련하고 애처롭고 안타까운 사람들 주변에 쌔고쌨어.”

세희는 얼굴도 눈에 확 띄게 예뻐 보였고 현 정권 아래서 한창 잘나가는 사업가의 딸이라서 학교에서 인기도 상당한 여자였다. 그러나 세희에게로 향하는 남학생들의 관심도가 높은 만큼 그녀를 비난하는 목소리도 컸다.

그렇게 안 봤는데 명품이나 밝히고 이놈저놈 양다리나 걸쳐가며 순진한 남학생들을 여우처럼 홀려서 울리기나 하고, 나중에 알고 보니 진짜 걸레라는 둥 부모 잘 만나 콧대가 높아서 하늘을 찌른다는 둥 같은 과 학생 영석이와 입 맞추다가 녀석이 실수로 세희의 혀를 깨무는 바람에 뺨을 얻어맞고 결국 영석이가 차였다는 둥 그녀를 둘러싸고 별의 별 해괴한 소문이 난무했다. 예쁜 세희를 질투하며 달리 씹어대는 여학생들도 꽤 많았지만 그건 아직까지 내가 확인한 사실은 아니었다.

그래. 세희 네 말이 맞는 지도 모르겠다. 밖에 나가면 불쌍하고 처절하고 가련하고 안타까운 사람들 쌔고쌨다는 그 말.”

방은 구한거야?”

왜 내가 아직까지 방 못 구했으면 세희 네가 내 잘 자리 마련해주려고?”

그건 뭐 그리 어려운 건 아냐. 내가 좋아하고 아끼는 선배니까.”

그녀가 좋아하고 아끼는 선배라서 나는 그날부로 세희가 마련해준 잘 자리를 그녀와 공유할 수 있었다. 홀로 시장좌판에서 수고하는 어머니가 대학등록금을 겨우 조달해준 덕분에 그래도 학교에 다니게 된 내 처지에선 세희의 잠자리배려는 눈물겹도록 고마운 처사가 아닐 수 없었다. 옹색한 공간에 이성에 기대 함께 둥지를 틀고 살아가는 신세였지만 가난한 대학생인 내겐 그런 궁색한 공간마저도 천국이나 다름없었다. 의뭉스런 눈길을 거두지 못하고 마주칠 때마다 쏘아보는 하숙집주인에게 나를 약혼한 남자라 세희가 둘러대서 주인이 던져오는 칙칙한 눈길에서 적어도 나만은 벗어날 수가 있어서 좋았다. 허름한 주거공간 안에서일망정 세희와 밥을 먹고 세희와 함께 학교에 가고 세희와 키득거리고 주말 내내 그녀와 더불어 지내는 삶은 나에겐 작은 행복이었다.

여기까지.”

세희는 언제나 그녀만의 선을 단호하게 그어댔다. 밤마다 수성으로 잔뜩 달아오른 내가 참지 못하고 넘으려는 선을 그녀는 언제나 전경들처럼 저지했다. 하여 나는 그녀와 함께 밥을 먹고 학교에 가고 도서관 에서 공부하다 집에 오고 찾아오는 밤을 그냥 덤덤하게 같이 맞이했다. 그녀의 지난날 배려를 묵살하는 배신을 때릴 수가 없어서 세희가 그려놓은 원 안에서 먹고 자고 공부하고 수성(獸性)을 잠재워가며 나는 속절없이 독수공방(獨守共房?)하는 대학생활을 이어가야 했다. 그래도 내가 명색이 남자인데 사내를 곁에 눕히고 어쩌면 이리도 편하게 쿨쿨 잠을 잘 수가 있을까, 하는 의문 때문에 그녀와 공간을 함께 한 처음 며칠 동안은 내가 그녀에게 남자 축에도 못 끼는 인간으로 전락한 것만 같아서 자존심이 잔뜩 상했지만, 세희를 감싸고 떠도는 풍문이 그냥 헛소문이란 걸 몸소 확인하게 된 거라 좋았고 시간이 흘러가다보니 둘의 관계가 남매사이처럼 자연스럽고 어쨌든 견딜 만했다.

시험날짜가 코앞으로 닥쳐오면 학교 앞 복사가게들이 그야말로 난리가 났다. 공부는 뒷전이던 학생들은 강의 중에 졸면서 개발 새발 받아 쓴 노트까지도 복사해서 돌려보느라 여념이 없었고 벼락치기 공부하느라 정신없이 분주했지만 세희만은 예외였다. 그녀의 방에서 기생할 수 있는 은혜를 입은 나로선 그녀가 남들처럼 복사가게를 드나들어야 하는 수고라도 덜어주는 게 어쩌면 그 은혜에 내가 보답하는 유일한 길이었는지도 모른다. 함께 수강하는 수업시간마다 나는 노트정리를 꽤 잘 했고 시험 날짜 2주전부터 깔끔하게 다시 노트를 정리해 예상시험문제까지 추가해서 세희에게 갖다 바쳤다. 세희는 무사히 시험을 잘 치렀다. 그런 내 희생덕분인지는 모르나 세희는 중간고사시험에서 나보다 더 높은 성적을 받았으니 말이다.

수고했어, 선배!”

말로만?”

그럼?”

매일 나한테 밥하고 빵하고 국하고 김치만 주지 말고 다른 것도 좀 달라고!”

결혼하기 전까진 절대 안 돼!”

나랑 결혼할 생각은 있는 거고?”

선배가 나한테 하는 거 봐서.”

하여 또 나는 뻣뻣한 통나무 같은 세희와 기어코 결혼하려고 강의시간마다 혼연의 힘을 담아서 그녀를 위해 열과 성을 다했다. 시시껄렁한 교수들 넋두리에 다름없는 강의내용까지도 꼼꼼히 받아 적고 집중하면서 세희의 환심을 사려고 필사적으로 노력했다. 하루에도 몇 번씩 도서관을 드나들고 리포트까지 대신 작성해주느라 안돌아가는 머리를 쥐어짜내 가며 세희를 위해 혼신의 힘을 쏟아 부었다.

나는 세희가 해맑게 웃는 모습이 예쁘고 좋았다. 하루가 힘겹고 노곤해지더라도 세희가 내게 수고했다며 웃어주기만 하면 그만인 거였다. 세희는 그런 내 땀과 열정에 감동을 좀 했다싶으면 그날 밤엔 이불을 공유할 기회를 나한테 주곤 했다.

여기까지.”

거친 숨소리로 내 손이 그녀 가슴에 가까워질 때마다 그녀로부터 나한테 하달된 명령은 늘 여기까지였다. 나는 또 깊어가는 밤에 그녀로부터 음흉한 손길을 거둬들여야 했고 독수공방(獨守空房)하는 부녀자처럼 뜬눈으로 새벽을 맞아야 했으니, 어느덧 나는 세희가 쳐놓은 울타리 안에서 그녀가 하라는 대로 하고 강아지처럼 그녀 뒤를 졸졸 따라다니며 그녀의 미래행복을 위해 속절없이 노동하는 노예 시지푸스(Sisyphus)가 이미 돼있었던 거다. 방바닥에 엎드려 책을 보면서 눈물 좀 찔끔거리는 줄 알았는데,

이 책 너무 슬퍼!”

하곤 북받쳐 오르는 감정을 참지 못하고 마침내 그녀가 흑흑 흐느껴 울기까지 하는 게 아닌가! 냄비에서 라면은 보글보글 끓어서 곧 넘치려는데, 나는 난감했다. 이성(異性)이 무언지도 모르는 그저 뻣뻣한 통나무라 치부하고 여태껏 그녀를 털끝하나 손 안대고 살아왔는데 냉랭한 통나무가 허구이야기에 흠뻑 젖어서 흐느껴 울기까지 하다니, 새롭게 다가오는 모습에 놀란 나머지 라면이 끓어 넘치는 것도 모르고 넋을 놓고 바라보다가 그만 후다닥 냄비로 달려가서 가스 불을 꺼야했다. 세희가 천년의 사랑에 감격하던 날밤에 나는 마침내 라면을 입안에 물고 세희의 입술을 가질 수가 있었다. 그녀의 혀가 입안에서 느껴지는 순간 무릉도원으로 갑자기 떨어지는 느낌에 정신이 아찔했다. 몽롱한 나도 하마터면 영석이처럼 그녀의 혀를 깨물 뻔 했다.


0
기사수정

다른 곳에 퍼가실 때는 아래 고유 링크 주소를 출처로 사용해주세요.

http://ptcn.co.kr/news/view.php?idx=675
기자프로필
프로필이미지
나도 한마디
※ 로그인 후 의견을 등록하시면, 자신의 의견을 관리하실 수 있습니다. 0/1000
이전 기사 보기 다음 기사 보기
사이드배너_정책공감
모바일 버전 바로가기